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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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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성경> 갈6:12-14
찬송> 182, 214장

●들어가면서 - 십자가가 강조되지 않은 설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께서도 좀 더 집중해서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강단에서 설교사역을 하면서 근 2년간 전한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참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외친 기억이 너무 적은 것이었습니다. 현실적인 교회 상황과 교인들의 상황에 우선적으로 답을 구하다보니 나타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십자가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제가 십자가 없는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설교든 그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그 자체를 강조한 설교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사역을 가정에서 주부가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유합니다. 가족들의 건강은 주부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들은 대부분의 영양분을 어머니가 아내가 해 주는 음식에서 섭취합니다.
교인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설교자에 의해 교인들의 영적 건강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어떻게 준비해서 전하느냐에 따라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주부들은 자주 인스턴트식품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그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편해서 좋고 아이들은 맛있게 먹어 좋고’하여 그것으로 대용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의 편의주의와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가공품들이 아이들의 건강을 얼마나 해치게 되는지는 요사이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각종 질병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 현장에서도 이와 똑 같은 현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힘드니까 편한 방법을 찾게 되고 교인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설교, 위로와 격려가 되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원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궁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지은 밥이 아니라 설교집이나 인터넷에 전시되어 있는 설교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좋을지 모르나 결국은 목사와 교인들을 모두 다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반성해 보았습니다.
‘내가 목회의 현실, 즉 이 현실과 상황에 말씀을 맞추려는 의도 때문에 정말 필요한 말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더라도 그 속에 영양가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잠시 입을 즐겁게 해 주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병들게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설교에서 가장 필수적인 영양소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빼놓고는 사실은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디 십자가가 설교의 내용에만 적용되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활의 모든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십자가 때문에 살고 십자가 때문에 죽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의 방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구체적으로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또 우리 자신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는 자리에 나가기 위해 어떤 것들이 요구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
바울은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구약의 많은 의식적인 율법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특히 유대인의 표식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쉽게 유대주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더욱 비판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이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동족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의 동족들이 이방인들과 교제를 갖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인 개종자들은 신자들을 저버리자니 신앙 양심에 꺼리고, 동족을 외면하자니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고.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들이 생각해 낸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할례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6:12절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이들은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는 것 역시 너무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십자가를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 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을 버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신자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인 바울
1)이전의 바울
그러나 이제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는 “그러나 내게는”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러나 내게는…”이라는 말을 쓸 때의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육체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전에 바울 자신이 그런 삶을 추구하고 살아 왔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오직 십자가’를 외치고 있지만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전에 지금 자신이 비난하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유대교의 지도자를 꿈꾸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엘리트였습니다.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자신은 육체를 신뢰하던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빌 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는 종교적으로 가문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즉 학벌도 좋았다는 말입니다. 학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력도 있었습니다.
선교여행에서 말을 잘하여 웅변의 신 허메(Hermes)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행14:12)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는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의 학자들을 압도할 정도로 철학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행17:17-18)
그는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랑거리고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2)현재의 바울 - “그러나”
하지만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이런 것들의 그의 자랑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16절에 “그러나 내게는”하고 말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절대적인 자랑거리를 간직하고 너무나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이 이전에 그렇게 자랑거리였던 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바울의 고백을 유의해서 들어 보십시오. 그는 지금 ‘이전의 것에 관심이 없어졌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의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전의 것이 현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잠시 뒤로 제쳐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즉 이전의 그렇게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십자가를 아는 것에 장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수록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이것들에게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는 볼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우리는 이런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 결신에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은 세상의 자랑거리에 대해 이미 쓴 맛을 본 사람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의 재미 - 돈 버는 재미, 노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에 빠진 사람은 십자가가 참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14:16-20의 비유에서 아무리 복음으로 권해도 들어 먹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 물질적 욕망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8)

또 어떤 사람입니까? 지식이나 재주의 욕심에 붙들린 자입니다.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9)

이런 사람은 우리가 권하기는 하되 아직 기도의 대상이지 강권의 대상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은 십자가를 보는데 장애를 가져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진수를 접하고 난 뒤에 이 사실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전에 왜 그렇게 십자가를 잘 볼 수 없었는지에 대해 알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주 안에서 진정 사랑하는 여러분, 왜 바울에게 십자가 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바울이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다시 산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14b를 봅시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세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중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좌우편에는 세상과 내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세상도 죽었고 나도 죽었습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이 믿음에 던져야 합니다. 세상은 나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죽었습니다. 나도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나도 세상에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는 것입니다.

♬찬204장 -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3절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후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 하리로다.

●십자가로 가까이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너무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세상의 일에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이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죽어 심판받아 지옥으로 가도록 예약된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하였고(골2:2) 이 비밀을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했으며(엡3:4) 이 비밀을 하나님이 세상에 알리려 하신다고 말했습니다.(골1:27)
바울은 이 비밀을 알리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던졌습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든 모르던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권능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은 다메섹 길에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실 갑작스럽게 변한 자신의 모든 변화에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실명, 또 아나니아 선지자의 안수로 다시 눈을 뜨게 됨.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미워했던 예수쟁이들이 믿는 그 예수가 분명 살아있고 역사하고 있으며, 나는 분명 그 분을 만났다는 것.
그 뒤에 그는 이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완벽하게 잘 알지 못하고 전했습니다. 단지 이전에 했던 일이 너무나 죄송해서 속죄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쟁이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칩거했습니다.(갈1:17, 18)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에 대해 말씀과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십자가의 비밀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감격과 희열이 넘쳤습니다.

그 후 그는 본격적인 사역을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서신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였습니다. 그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십자가에 대한 체험을 그는 아라비아의 묵상의 기간 동안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 기간은 그가 십자가 앞에 자신의 무릎을 꿇었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울이 남긴 성경을 읽을 때 자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과 “아멘”이라는 말을 접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십자가와 그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며 찬송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제 바울보다 훨씬 더 쉽게 십자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을 통해 많을 것을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 앞에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 십자가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2000년 전의 십자가가 아니라 오늘의 십자가로 경험해야 합니다.

예)박종훈 집사 - 지금은 전도사
그는 기도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하루에 3시간, 5시간, 7시간을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5시간을 기도할 때 낸 책이 ‘예수님의 딜레마’이고 7시간 기도할 때 낸 책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의 기도의 방법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제일 처음에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십자가 앞으로 나가갑시다. 그 아래에 무릎을 꿇어봅시다.

♬찬496장 -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은 것 같지도 않고 나도 세상에 대해 죽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나도 나의 정욕을 버리지 못해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십자가를 깊이 경험해야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TV에서 영화 한편을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루는 온종일 그 영화의 분위기로 살았습니다. 영화의 장면과 영화가 가져다 준 의미가 계속 나의 마음에 살아있었고 또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매일 경험하고 그 십자가 보혈로 우리 자신을 덮는 작업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영향력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십시다. -아 멘-(주후20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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